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7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7호를 발췌해 놓는다. 어젯밤에 시작을 했지만 대부분은 오늘 아침에 쓴 것이다. 외출에서 돌아와 저녁에서나 연재된 글을 읽었다. 지난주에 나온 <좌파들의 반항>(들녘, 2010)이란 책에 지젝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주말에 읽어봤는데, 그 내용이 서두를 차지하고 있다.   

 

로버트 미지크의 <좌파들의 반항>(들녘, 2010)을 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나온다. 2005년에 독일에서 출가된 책인데, 슬라보예 지젝을 소위 ‘래디컬 시크(Radical Chic)’라고 보는 부정적인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독일 일간지 <차이트(Zeit)>의 문화부 편집장이자 중도파 지식인 외르크 라우가 막 출간된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2002)에 자극을 받아 그를 가리켜 ‘선량한 테러’를 꿈꾸는 위험한 인물이며 ‘겉멋만 부리는 영웅(Radical Chic)’이 되려 한다고 비난했다는 것이다.

‘겉멋만 부리는 영웅’이란 표현은 ‘시크’하지 못한 번역인데, 아마도 그냥 음역하는 게 나을 듯싶다. 이 말의 저작권자는 뉴욕의 저널리스트 톰 울프다. 그가 1960년대 후반 미국 상류사회의 좌파 자유주의자가 블랙 팬더당(흑인 과격파) 기금 모집 파티를 열었을 때 그걸 비꼬는 의미로 처음 쓴 표현이라 한다. “한가한 부르주아지들과 아무런 의무감도 없이 반항이라는 몸짓으로 스릴을 즐기며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중산층 젊은이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고. ‘반항의 이미지’를 과시하고 소비할 따름인데, 가장 비근한 예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 같은 것이다.   



지젝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는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보아 아직 ‘래디컬 시크’는 못 되는 듯싶지만(래디컬 시크가 되려 한다?), 좌파 상업주의 혹은 ‘유행 좌파’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은 온당하다. 그들의 제스처가 기껏해야 공허한 반항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미지크는 이 문제를 라우보다 좀더 복잡하게 생각한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인쇄된 T-셔츠를 입었다고 놀림감이 되는 젊은이들이 만일 바리케이드를 치고 방화를 한다면 좋게 받아들여질까? 무엇이 과연 공허하지 않은 몸짓일까? 그 몸짓은 대체 언제쯤 완벽하게 공허해질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차이트>와 <뉴욕 타임스>처럼 세계적인 유력지의 문화부에 근무하는 전문가들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유명인사들이 반항의 몸짓을 보이고 반항아들이 유명인사가 된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다.”(13-14쪽)

그러니까 지젝과 같은 ‘과격한 급진주의자’가 유명인사가 되는 것도 한갓 유행에 불과하며 알고 보면 그 또한 자본주의 상품화에서 포섭된다는 비판은 절반만 옳다. 네 책이 많이 팔렸으니 너도 자본주의의 수혜자가아 아니냐는 비판이다. 대개 그런 비판은 근엄한 온건좌파에게서 나온다. “적지 않은 주류가 그를 허풍을 심하게 떨면서 공허한 제스처 속으로 빠지고 마는 래디컬 시크와 학문적으로 잘난 체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혐오감을 주는 인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99쪽) 독일 지식사회에서 지젝에 대한 숭배 못지않게 반감도 크다는 걸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미지크의 판단은 양가적이며 유보적인 것처럼 보인다. 다소 길지만, “그들은 지젝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이건 대타자의 시각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세 가지 단락을 인용해본다.

“지젝은 잘 나가는 급진좌파들 가운에서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이며, 테제의 소실점으로 빠져들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균형과 중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 꼽힌다.”
“지젝이 세계화된 이론의 상류계층의 진귀한 현상 중의 하나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냉소가이며 광적이며 정치적으로 오류를 지닌 그는 한편으로 위대한 도덕주의자이기도 하다.”
“지젝은 진지한 사고의 물꼬를 터주기 위해 진지하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총명한 그가 종종 어릿광대짓을 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지 않으려는 순간을 역으로 이용해서 원하는 바를 이끌어내는 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동의할 수 있는 구석이 많다. 특히 마지막 인용이 그러한데, 지젝의 ‘어릿광대짓’이 전술적이라는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MTV 철학자’로 불린 그가 독일에서는 ‘래디컬 시크’로 비꼼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지젝은 그것을 ‘의도와 다르다’며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러한 상황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려 한다. 한 연극의 대사를 빌자면,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를 몰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바깥은 없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다. “반항의 제스처만 가지고는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란 엄포도 들린다. 체계(시스템)는 물론 막강하다. “시민들의 권리는 편협한 논리에 따른 생산시스템, 말하자면 경제체계에 편입된다는 이유 때문에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라는 점도 맞다. 하지만 아킬레스건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떠한 시스템이든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으려면 제반 조건들이 주체의 결정권을 장악해서는 안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지젝이 노리는 바도 바로 그 점이다. 주체가 문제라는 것. 

(...)
 
잠시 우회하였는데, 다시금 방향을 <실재계의 사막>으로 틀어본다. 1장의 제목은 ‘실재계에 대한 열정, 모사에 대한 열정’이라고 붙어 있는데, 이 대목은 2003년 방한 강연을 담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의 제1강연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이 겹친다. 그래서 같이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이미 실재(계)에 대한 예비적 설명은 앞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실재계에 대한 열정’ 혹은 ‘실재의 열망’이 어떤 의미인가는 대충 짐작하실 수 있을 터이다.  

 

그래도 지젝은 실재에 대한 열정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브레히트보터 에른스트 융어, 오시마 나기사 등의 많은 사례를 동원하고 있는데, 오시마 나기사는 <감각의 제국>의 감독으로서 오시마를 가리킨다. 두 연인의 성애 관계가 서로를 고문할 정도로 과격해지다가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컬트영화’였다. 이런 것이 말하자면 ‘실재에 대한 열정’이다. 그 궁극의 형상으로 지젝은 여성의 성기를 보여주는 포르노영화의 장면도 예시한다.

“가령 여자 성기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장면, 게다가 진입 중의 남자 성기의 머리에 설치된 소형 카메라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지점에서는 어떤 전회가 일어난다. 욕망의 대상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게 되면, 성적 매혹은 구토로 전환된다. 고기 덩어리의 실재 앞에서 구토하게 되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16쪽)

다른 대목의 번역은 <탈이데올로기>가 <실재계 사막>보다 수월하지만 이 대목만은 그렇지 않은데, 소형 카메라를 ‘남자 성기의 머리’에 설치했다고 옮겼기 때문이다(그런 설정이 엽기적이다). 그것은 실제 성기가 아니라 ‘모조 음경(dildo)’을 가리킨다. 과연 여성적인 것의 핵심에 무엇이 있을까란 호기심에 그 ‘욕망의 대상’에 가까이 근접하지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살의 실재계(the Real of the bare flesh)’일 뿐이다(‘고기 덩어리’도 좀 과도한 번역이다). 요는 9.11 테러, 곧 “근본주의적 테러라는 것도 실재계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10. 08. 31.


댓글(7)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0-08-31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책이 그린비에서 나오던데...하여간 엄청 비싸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지젝 입장에서는 책을 거의 무료로 해서 팔아야 쫌 어필할거 같은데..ㅋㅋ 제발 책값좀 인하하고 뭐라 좀 말했음 좋겠습니다..ㅎㅎ 비싸서 사서 볼 염두가 안난다는..ㅎㅎ

로쟈 2010-08-31 22:04   좋아요 0 | URL
지젝의 영어책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번역본은 수요가 한정돼 있어서 그렇겠지요. 인문서 독자가 소설 독자만큼만 돼도 책값이 1/3은 떨어질 텐데요...

chihyun7 2010-09-02 02:20   좋아요 0 | URL
지젝은 원서가 한국어 번역본보다 더 싼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러니까 지젝이 책으로 돈을 챙기려는 의도는 없다고 봐야한다는...

비로그인 2010-09-01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들이 생각하는 지젝' 중 마지막 인용이 마음에 드네요.
지젝의 강연 동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끊임없이
얼굴을 만지고 쓸어내면서 말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고
저러다 '자연발화'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얻고 고양되는 느낌이었달까요.
건강하게 오래 활동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로쟈 2010-09-01 23:48   좋아요 0 | URL
틱 증세라고 합니다. 여하튼 열정만큼은 존경스럽죠.^^

chihyun7 2010-09-02 02:23   좋아요 0 | URL
지젝이 방한했을 때, 친구가 간사로 일했었는데, 지젝이 당이 딸린다고 해서 구경하러간 저보고 얼른 초콜렛 사오라고 부탁한 적이 있죠. 여러모로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증상이 많은 사람인듯합니다.

로쟈 2010-09-02 08:44   좋아요 0 | URL
네, 그때 당뇨가 있다고 했었는데,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네요...